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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전통의맥
마은진  |  akdmswls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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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26  15: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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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景福 Gyeongbokgung Palace

   
▲ 근정전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 정도전,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 10월 7일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정궁, 법궁이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소재.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 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이름을 지은 이는 정도전이다. <시경>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 년 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잔치 끝에 천자에게 바치는 노래였는데, 정도전은 연회 중 대취한 태조가 "경은 이번에 새로 지은 궁궐의 이름을 지어서 우리 왕조가 만 대까지 빛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마자 즉석에서 일어나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으로 지었다고 한다.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의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붙였다

   
▲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선 시기의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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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면서 정도전이 경복궁 건축의 실질적 책임자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정도전이 경복궁에 개입한 것은 위치 잡는데 왈가왈부한 것과 건물에 이름 붙인 것 뿐이다. 경복궁 건설을 위해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 설립되었고, 그 책임자로는 조선건국공신이었던 심덕부가 임명된다. 심덕부는 고려시대에 문무 모두에 이름이 있고, 최무선의 화포도 운용해 봤고, 이성계의 9 공신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아버지라고 하는게 더 알기 쉬울 것이다.

   
▲ 근정전 내부

하지만 실질적으로 경복궁 건축을 한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환관 김사행(金師幸)이다. 김사행은 원래 고려인이었지만 원나라 환관으로 차출된다. 그런데 김사행이 원나라 환관으로 있으면 있었던 곳이 원의 궁궐 수리를 담당했던 관청 전연사(典涓司)였다. 이후 김사행은 노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오면서 같이 고려 땅을 밟게 되는데, 이후 최고의 건축전문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환관을 총감독하는 판내시부사까지 올랐다. 이후 김사행은 공민왕릉과 노국대장공주릉의 건설을 주도했고, 이는 이후 조선왕릉의 기본이 된다. 경복궁 건설에 김사행이 차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진사대부가 지은 궁궐이기 때문에 유교 이념을 반영하여 이전 왕조들의 궁궐에 비해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지어졌다.[4] 다만, 현재의 경복궁은 과거의 경복궁과 차이가 있고 이전 국가들의 궁궐도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으며, 실질적 건축 책임자인 김사행이 원나라 황실 건축에서 배웠고 고려에서는 사원 건축 전문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당시 경복궁이 유교 이념을 얼마나 반영해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시대의 건축은 사원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5] 조선 왕조의 원찰이었던 회암사는 구조가 경복궁과 상당히 유사하고, 초기에 경복궁에서 사용했다는 청기와도 회암사 터에서 발견된다.

   
▲ 경회루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복궁은 법궁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엄정한 기하학적 공간 분할, 반듯한 축선 상의 건물 배치, 정연한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다. 이궁인 창덕궁(+창경궁)과 양궐 체제를 갖췄는데, 임금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두 궁궐을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그 자리만 출입이 금지된 채 200여 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이 지은 경복궁과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의 모습은 차이가 있다. 세종이 왕자 시절 2층에서 자다가 병이 났다는 등 다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또한, 근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는 언급 등 차이점이 보인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 왕실에서 제작했다는 석가탄생도 등에서 묘사된 건축 양식을 통해 그 당시의 경복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최대 규모 5,000칸까지 서서히 확장되었던 이전 건물과 달리 흥선대원군은 단숨에 7,400칸짜리로 중건했다. 단숨에 1.5배 크기가 된 것이다.

   
▲ 북궐은 경복궁의 별칭으로, 북궐도는 고종때 제작된 북궐도형을 근거로 한 조감도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해 있다. 가장 가까운 전철역은 경복궁역이며,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안국역이나 광화문역에서도 걸어갈 수 있다. 경복궁 앞길에는 각종 관청이 있어 육조 거리라 불렸으며, 이 길이 오늘날의 세종대로다. 당대에도 국가의 중심 거리였기 때문에 육조 거리는 지금의 세종대로의 폭과 거의 같은 폭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종대로 중앙에는 광화문광장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에는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서울청사,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으며 인사동 거리도 경복궁에서 꽤 가깝다.

역사 -조선 전기
경복궁 입지 결정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한양에서 궁궐의 터를 잡을 때, 처음에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터를 잡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노인이 "이러, 이 무학 같은 소야."라고 하는 바람에 놀란 무학이 좋은 터를 묻자 여기서 십 리를 더 가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 터가 왕십리[9]가 되었고, 노인이 말한 곳이 현재 경복궁 터였다고 한다.
경복궁은 풍수를 고려해서 지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모두 수도로 한양을 지목했지만 무학 대사는 동향을,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무학 대사가 2가지 예언을 했는데, 첫 번째 예언과 두 번째 예언은... 당연히 위의 두 이야기는 야사일 뿐이며 첫 번째 야사는 사실 무학대사가 한양을 지을 때나 경복궁을 지을 때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했다고 해봤자 한양에 대하여 태조가 묻자 좋은 곳이긴 한데 대신들과 백성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십시오"라 한 게 전부이다.또한 두 번째 이야기는 정도전이 풍수지리를 괴력난신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두번째 내용은 역시 야사일 뿐이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여가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다. 흔히 언급되는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이다. 자금성은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다. 즉,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따 지었다거나하는 설명은 틀린 설명이다. 완공 후 정도전이 궁궐의 주요 전각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등의 이름을 정했다. 처음 완공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390여 칸이었는데, 흥선 대원군 중건 당시 규모가 7225칸이었다는 점을 보면 상당히 작고 조촐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완공 당시 궁궐 중심부의 핵심 시절 위주로 건설되었으며, 궁궐 주위를 구분하는 담장도 없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증설 공사가 이어졌는데, 특히 세종 대에 대대적인 확장 공사가 이루어져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도록 서쪽으로 틀어지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의 산(火山)'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하였다.

   
▲ 경복궁 내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1405년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는데,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여 이곳으로 들어왔다. 태종은 경복궁을 매우 꺼려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를 명하고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창덕궁이 완공되지 않아 입궐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이때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민가에서 일주일 정도 숙박한 후에 창덕궁에 입궐했다. 태종이 경복궁을 얼마나 꺼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사실 그럴만한것이, 경복궁이라는 이름부터 시작해서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의 전각이름을 지은 당사자가 바로 태종이 죽인 정도전이다. 태종 입장에서 경복궁에서 산다면, 매일 잠 자러 들어가야 하는 강녕전이나 출근해야 하는 사정전의 현판만 봐도 누가 떠오르겠는가?
이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태종 11년에 사간원에서 "태조께서 지으신 경복궁을 비워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는요지의 상소를 올려 태종에게 경복궁에 다시 거처하라고 주청한 일이 있다. 그러나 태종은 꽤 솔직하게 "내가 무인년에 말하기 부끄러운 일을 했는데, 어찌 차마 경복궁에 거처할수 있겠느냐?"며 거절하였다.
태종은 경복궁을 기피하고 창덕궁에서 주로 거처했지만, 경복궁을 방치하지는 않았는데, 큰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 거의 경복궁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당시 처음 만들어진 창덕궁은 의례를 위한 외조는 매우 조촐하게 건축되었는데, 정전인 인정전은 3칸 규모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처음에 창덕궁을 건립할 때, 주요 행사는 경복궁에서 치루고 창덕궁은 거의 주거 용도로 이용했던 것 같다. 다만 태종은 아들에게 양위를 결정한 후 퇴위하면서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의 외조를 대대적으로 크게 고쳐짓는 공사를 명했다. 한편 재위 기간 동안 태종은 경복궁에서 큰 행사를 치루기 위해 박자청을 시켜 경복궁의 추가적인 중수 공사를 계속 진행했다. 1412년에는 연못에다가 어찌 건물을 올릴 수 있냐는 신하들의 우려도 불구하고 경회루 건설을 지시했고, 박자청은 이를 실현시켰다. 세자 양녕대군이 친필로 직접 경회루의 현판을 써서 태종을 기쁘게 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다만 태종 대에 건설된 누각은 흥선대원군 때 지어진 현재의 것보다는 작은 규모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회루 하단의 석조 기둥들은 태종 대에 만들어진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가 흥선대원군 중건 당시 다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후기 경복궁 터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황폐한 가운데 경회루의 석조 기둥들은 남아있는 것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 세종 대에 거치면서 경복궁은 더욱 대대적인 확충 공사가 이루어졌다. 세종은 태종과 다르게 협소한 창덕궁보다 넓은 경복궁을 선호했다. 선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주로 창덕궁에 거처했지만, 태종이 승하한 후 세종은 경복궁 공사를 명하였고, 집권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경복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봤다. 특히 비만 및 눈병으로 고생하던 후기에는 거의 경복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경복궁에서 세종의 왕도 정치의 흔적이 녹아 있는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가 집현전 전각인데, 왕이나 왕족이 사용하지 않는 궐내각사에 불과한 건물임에도 불과하고 집현전은 경복궁에서도 근정전과 경회루 다음 가는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 건설되었다. 세종 대에 여러 전각이 새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다소 작게 건설된 사정전(편전) 등의 기존 건물들을 중수하기도 했다. 1431년에는 광화문이 세워졌다. 이처럼 경복궁은 세종 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 전기 경복궁의 기본적인 형태는 세종 때 완성되었다. 이후 경복궁은 조선 전기 내내 조선의 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세종대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지속적인 증개축을 거쳤다.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기와가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탔다.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는 명종 때 발생했다. 1553년(명종 8년) 대화재가 발생해 근정전을 제외한 편전 및 침전 구역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이때 조선 왕조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보물과 유산들도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윤원형 등의 지지하에 왕이 독촉한 결과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어 이듬해에 매우 신속하게 중건이 완료되었다.
                                                                              사진 마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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