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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21  10:4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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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나들이 창덕궁

   
▲ 금천금

사적 제122호.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지만,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해왔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창덕궁은 고종 때까지 법궁의 기능을 하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 생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제2대 정종은 옛 도성인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제3대 태종은 개성에 남으려는 대신들의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1404년(태종 4) 다시 한양 천도를 결정하였다. 이 때 경복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새로 창덕궁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는 경복궁에서 있었던 정치적 사건에 대해 태종이 꺼려한 이유가 컸지만, 두 개의 궁궐을 동시에 운영하는 양궐체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405년 10월에 공사가 끝났으며, 10월 25일 창덕궁으로 이름 붙였다. 이 때 완성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이었다.

   
 

임진왜란 중 소실된 궁궐들 중 제일 먼저 복구를 시작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이 먼저 복구된 까닭은 그전까지 임금들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 창덕궁이었으며,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가세되었기 때문이다. 창덕궁 복구 공사는 선조 말에서 광해군 초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건하고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이후 효종대에는 대비를 위해 수정당, 만수전 등이 건축되었고, 현종대에는 집상전이 건축되었다. 숙종대에는 제정각을 건축해서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했고, 청심정, 영타정, 사정기비각, 능허정, 애련정 등을 지으면서 후원을 본격적으로 꾸몄다. 정조는 학문을 중심에 둔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각종 시설을 건축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봉모당, 개유와, 열고관, 서고, 서향각 등을 세워 역대 임금의 자료와 새로 구입한 도서류를 보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세자를 위한 공간도 크게 확장했다. 중희당과 수강재가 대표적이다.

   
▲ 부용지 전경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 없이 사용되었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글/임학근  사진/김세권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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