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보
커버/특집
3.1절특집 수남 고석진 선생 독립운동가구한말 우국충정의 의병장 독립의군부 참모총장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鎭) 선생
한국화보  |  hankukhwabo@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3.22  11:58:4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msn

 

3.1절특집 수남 고석진 선생

구한말 우국충정의 의병장 독립의군부 참모총장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鎭) 선생

   
수남 고석진 선생 영모
   
▲ 光武王 으로부터 勅命  高錫鎭  정이품 정헌대부 독립의군부참모총장 .光武十八年二月

고매한 품성의 학자

구한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살리고자 국권회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고석진(1856~1924). 예로부터 충절의 고장이라 알려진 고창 신림 태생으로 을사년에 면암 최익현의 수제자로 활약하던 인물이다. 학문이 심오하고 품성이 고매하여 면암이 남중명사라 극찬했다고 한다. 또 어느 후학은 선생을 일컬어 “의리에 강명하고 빈부에 초월함으로써 후학에 모범이 되셨다. 덕성이 온화하여 춘풍같으되 의리와 흑백을 가리는 데는 추상열일과 같아 가히 범할 수가 없었다”라고 평했다.

   
▲ 1928년 후학들이 방호정사의 안쪽에 祠宇를 지어 도동사라 이름하고 최익현을 주벽으로 고석진을 함께 모셨다. 일제시대에는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향사가 금지되었다가 1947년에 와서야 부형하였다.

고석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절식자진하려는 면암을 찾아 투쟁할 것을 권하고 전국에 포고문을 돌리며 참모 역할을 했다. 또한 면암의 거사지가 전북 태인으로 결정되는 중대한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 건국훈장 애국장,건국포장

그러나 고석진의 공적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 공적을 기려 고창군 신림면에 도동사(道東祠)를 건립하였으나 왜경들의 감시 때문에 제사 한번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고 한다. 독립이후에도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건국포장(1977)과 건국훈장 애국장(1990)이 정부에서 추서되었다.

   
전북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1길59 수남 고석진 선생  생가

고석진은 1856년 1월 11일, 전북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서 태어났다. 유림출신의 집안에 태어난 그는 의관(議官)의 벼슬을 지냈다. 본(本)은 장흥(長興), 휘는 석진(石鎭), 자는 청여(淸汝), 호가 수남(秀南)이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어 호남지방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후에 남도의 유림종장이 되었다.

   
▲ 전북 고창군고창읍 공원있는  한국유림 항쟁 파리장서비
   
서울 장충공원에 있는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강직함과 신의를 중시한 애국지사

국가 존립의 위기에 놓인 을사년, 면암 최익현은 강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통탄에 빠져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인품 있는 관료 이용원, 이도재, 이성렬, 이남규, 곽종석 등에게 국난 타개의 길을 모색하자고 청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해 한탄하고 있던 때였다.

   
수남 고석진 선생 강학비 전북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방호정사 내 있다

“이때 고석진이 이렇게 건의했다. “전북 태인(泰仁) 사람 임병찬이 이미 갑오년부터 비적을 토벌한 공이 있으니 그의 충의는 믿을 만합니다. 이 사람과 함께 모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태인의병 훈련지-상종성

평소 강직하고 신의를 중시하는 고석진을 깊이 신뢰한 면암은 그의 말에 희망을 얻었다. 고석진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훗날 그 유명한 면암의 거사지가 태인으로 결정된 것이다.

   
▲ 태인의병 창의지 무성서원

그리하여 면암의 의진은 고석진과 임병찬을 축으로 최제학, 최학령, 이용길 등 많은 의사들이 뜻을 합하여 군수물자를 준비하고 지방으로 긴밀히 연락을 취했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던 그들은 1906년 5월 민종식 의진이 홍주성에서 기세를 올리자 그것에 호응하여 궐기를 서둘렀다.

   
▲ 태인의병 유숙지  순창구암사

호탕한 기개의 영웅호걸

80명의 병정과 9백 자루의 총을 준비한 의진은 거사를 확정하고 4월 15일 태인을 향해 출발했다. 면암은 문하생 고석진을 축으로 수십 명을 거느리고 태인 무성서원에 들어가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나는 구신(舊臣)의 처지에 있어 진실로 종묘사직과 민생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만천하에 외치고자 함이요, 성공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사생을 초월한다면 천지신명이 반드시 도울 것이니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상대하는 그대들은 모두 사생을 함께 하겠는가.”이에 고석진은 이렇게 화답했다. “백발을 휘날리며 밭이랑서 뛰어 다님은 초야의 충성심을 바치려 함이로다. 왜적을 치는 것은 사람마다 해야 할 일, 물어 무엇 하리오.”

   
▲ 방호정사 이 곳은 수남 고석진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방호정사(1923년)건립
   
▲ 방호정사
   
▲ 방호정사

고석진을 비롯한 지사들은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맹세했다. 이튿날 고석진은 포군을 모으러 떠났으나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순창으로 들어간 의진은 좌불안석이었다. 그 때 멀리서 의진을 향해오는 상여가 보이고 초혼가가 울려 퍼졌다. 이를 수상히 여긴 의진에서 자세히 관찰하니 상주는 바로 변장한 고석진이었다. 정시해가 달려와 반기며 “아니 수남 선생, 이 어찌된 일이오?” 하고 물으니 고석진은 호탕하게 웃으며 “호상노릇 좀 했네. 초혼가를 부르느라 목이 다 쉬었구려.”하고 대답했다. 그가 메고 온 상여에는 소총이 가득 들어있었다. 고석진의 기계로 무기가 무사히 운반되고, 포군 30명이 가세해 성세가 더욱 커졌다. 의진은 쫓아온 왜병을 순창 귀암사 성밖에서 물리쳤다.

   
방호정사

 

후대의 귀감이 된 의열지사의 삶

의진의 기세가 날로 커지자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시문이 내려왔다. 진위대에 포위되자 면암은 선비들을 해산시키고 고석진 등 22명만이 남았다. 드디어 관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면암은 동족끼리 박해할 수 없다며 조용히 앉아서 날아오는 유탄을 기다렸다. 정시해 등 9명이 순국했으나 고석진은 여전히 기개를 잃지 않고 적을 꾸짖었다고 한다. 고석진은 관군에 붙잡혀 서울로 호송된 후 오랜 취조 끝에 6월25일 4개월 감금 선고를 받았다.

그밖에 면암 최익현은 3년, 임병찬은 2년 대마도 유형 선고를 받았고, 최재학은 4개월, 양재해ㆍ이용길ㆍ임현주ㆍ김기술ㆍ문달환ㆍ조두식ㆍ조영선ㆍ유해용ㆍ나기덕 9인은 각각 태(苔) 1백대를 선고받았다. 이들을 세상에서 '순창12의사'라고 부른다.

10월에는 사령부로부터 석방된 고석진과 최제학은 면암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임병찬의 전보를 받고 면암의 장남 영조(永祖)와 함께 수의를 준비해 가지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11월 5일 대마도에 도착하여 면암을 면회할 수 있었다.

다시 부산으로 나와 몇 가지 약재를 준비하고 면회하고자 할 때 11월 17일 이미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부산에서 설위 망곡(設位望哭)하였다.1910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재기할 때에 다시 참모관이으로 활동하였으며 1912년 2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참모총장의 고종의 칙명을 받아 전남북지역의 조직을 만들고 1914년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5월23일 북부조직확대 중 독립의군부는 일경에 발각되어 와해되었다.

1919년 고종 붕어 후 파리만국평화회담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전국유림대표137명 중1인으로 서명하여 독립을 위한 쟁취하고자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일로 총독부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자유를 빼앗긴 몸이 된다. 이에 삶과 죽음을 도외시하고 호적과 세금도 거절한 채 병을 얻어 1924년 눈을 감았다. 일생을 의열지사로서 살다 간 고석진 선생. 그의 족적은 진정한 애국자가 드문 오늘날 커다란 귀감이 아닐 수 없다.

1924년 12월 26일 서거하니, 묘소는 신림면 가평리 수산에 안장하였다.순창12의사로 도동사(道同祠)에 배향하였다. 저서로 『수남집(秀南集)』 방호집 이 있다.

자료.

·매천야록 382·386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69·373면·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93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7면 출처 : 국가보훈처

   
수남 고석진선생 손 고수원
   
수남 고석진선생 증손 사진작가 고광숙

수남 선생의 손자 고수원씨는 자비를 들여 유명무실했던 도동사를 복원해 선생의 위덕을 기리고 있다. 호산(壺山) 송성용(宋成鏞)과 거창(居昌) 신은범(愼恩範)이 쓴 ‘수남고선생강학비(秀南高先生講學碑)’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슬프다. 선생은 효가 신명에 통하고 학은 천인을 연구하고 의리는 춘추가 엄하고 정성은 금석을 관철하여 직하고도 온하며 관하면서도 유제하다. 조국의 망함을 슬퍼하여 이둔을 따지지 아니하고 만사를 무릅쓰고 대의를 천하열국에 밝혀 공을 당일에 이루지 못했으나, 그 후 을유의 광복이 뉘의 힘이런고. 선생은 가히 인극을 붙잡고 공이 방국에 있다 하되 과언이 아니로다. 나 또한 토복의 일로 이역의 전장에서 처구한 지 삼십년에 선생같은 분들을 뵙지 못함이 한이러니 이제 도동사임 신군사범이 그의 손 수원과 같이 멀리 찾아 나의 글을 부탁하니 특히 의기가 상감되어 사양할 수가 없은 즉 한 가지 고할 말이 있다. 만일 세상에 선생을 존모하는 것을 단지 문장과 절의로만 한다면 선생을 깊이 아는 분이 아니다. 절의는 도학의 번리다. 도학이 없는 절의가 없고 도학은 또 강학으로부터 이루나니 이 강학비에 쓰지 아니할 수가 없는 바다.”

글 /임학근 사진 고광숙

 

< 저작권자 © 한국화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한국화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네이버밴드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135-7 세진빌딩6층 한국화보,국제보도연맹  |  대표전화 : 02)720-2883  |  팩스 : 02-720-3855
서울시 도봉구 시루봉로58 604/302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라 10497  |  발행인 : 고광숙
Copyright © 2011 한국화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ankukhwabo@naver.com